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뤄원간 사건 (문단 편집) === 2차 반전과 내각의 붕괴 === 하지만 뤄원간의 체포는 처음부터 중의원과 결탁하여 총통이 되고 싶었던 직예군벌 천보파[* 차오쿤을 추종하는 보정파와 차오쿤의 동생 조예를 추종하는 천진파를 통틀어서 천보파라고 한다.]의 수장 [[차오쿤]]과 긴밀히 연계되어 있던 것이었다. 따라서 11월 23일, 차오쿤은 전보를 보내 뤄원간이 뇌물은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합동안의 내용이 중국에 큰 손실을 초래하며 국무회의와 국회동의를 거치지 않은 독직의 혐의가 있다고 비판하고 특별법정을 통해 철저하게 규명할 것을 요구했다. 차오쿤은 국고 손실에 대해 다음과 같은 예를 들었다. * 1. 원래의 차관은 일부 외에는 4,5리의 낮은 이율이었으나 신차채표는 일률적으로 8리로 책정하였다. * 2. 오스트리아와 선전포고한 기간은 이자도 물지 않아야 하는데 그 기간까지 쳐서 복리로 계산하여 채무가 증가하였다. * 3. 원래의 치관 중 일부는 군수품 구매차관으로 60여만 파운드의 선금을 준 채 전시관계로 물품을 인도받지 못했는데 이번에 군수품구매차관을 취소하면서 선금까지 포기하였다. 이로 인하여 뤄원간의 혐의는 뇌물수수에서 국회, 국무회의 동의 없이 국고손실이 큰 협약을 첨자한 위법행위로 바뀌었다. 차오쿤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우페이푸의 부하 소요남, 장복래도 동의를 표했으며 직예파 전체독군들과 안휘파의 [[루융샹]], [[허펑린]]까지도 뤄원간의 죄를 비난하면서 엄중한 규명을 요구하였다. 여론이 뒤집힘에 따라 뤄원간의 보석이 취소되어 다시 검찰청에 입감되었다. 중의원은 국무총리 [[왕충후이]]사판안, 외교총장 [[구웨이쥔]]사판안을 추가로 통가시킴으로 내각을 공격하였으며 베이징의 시민단체들이 시위를 벌여 뤄원간은 물론, 뤄원간의 불법체포를 비난한 6각료를 처벌하라고 주장하였다. 이날 시위는 백에서 수백명이 운집하였는데 한 청년이 이 시위는 민의를 대표하지 못한다고 비판하다가 시위대에게 구타당하는 등 소동으로 이어졌다.[* 하지만 이미 베이징에서는 수만명이 운집한 시위도 여러차례 있었다는 걸 감안한다면 두들겨맞았던 저 청년의 주장대로 민의를 대표한 것과는 거리가 먼 어용시위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.] 사태가 이렇게 치닫자 우페이푸는 개각 지지를 철회하고 리위안훙 총통에 대한 옹호와 차오쿤에 대한 복종을 선언하고 뤄원간 사건에 더 이상 개입하지 않겠다는 통전을 쳤다. 결국 11월 25일, 차오쿤을 지지하는 보정파 각료를 제외한 나머지 관료들이 전원 사직하였고 이로써 자유주의 지식인들의 기대를 모았던 호인내각은 붕괴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